여긴 늘 음악이 맴돌아,
사연 없는 사람 없으니까”필하모니아 오던 날, 소록도 사진사 이남철씨의 특별한 손님 맞이소록도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 제165호 | 20100509 입력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허락해준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감사합니다.” 5일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소록도의 필하모니아’ 공연을 영상 메시지로 축하했다. “위대한 음악이 삶을 바꾼다는 것을 함께 확인하자”고도 했다. 이날 공연을 주최한 ‘레이디 R 재단’의 로더미어 자작 부인(한국명 이정선·61·사진 오른쪽 보라색 옷)이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아슈케나지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가수 조용필씨가 ‘친구여’와 ‘꿈’을 들려줬다.
사진작가 강태욱
이남철(61)씨를 뒷모습으로 처음 만났다. 5일 오후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우촌복지관에서였다. 공연 ‘소록도의 필하모니아(The Philharmonia at Sorokdo)’가 열린 날이다. 영국의 대표적 교향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소록도를 처음 찾아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을 연주했다. 역시 소록도가 처음인 가수 조용필씨는 ‘친구여’와 ‘꿈’을 불렀다. 영국의 로더미어 자작 부인, 정운찬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찰스 왕세자는 영상 메시지를 보내 공연을 축하했다.
취재 경쟁도 뜨거웠다. 신문사·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이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몸싸움하는 사이에 이남철씨가 있었다. 자신의 비디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킨 채 이리저리 앵글을 잡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키는 작았다. 카메라가 놓인 삼각대를 조금 넘겼다.
공연 시작 전 만난 소록도 주민, 병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소록도 사람들 이야기가 궁금하면 이남철을 찾으라”고 일러줬다. “열심히 카메라를 찍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소록도에서 하나뿐인 캠코더가 이씨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만난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걸음을 멈추고 살펴봤다. “햇빛에 하도 나가 있어서 그래.” 그는 이날 공연을 기록하기 위해 이틀 전부터 돌아다니며 땡볕에 얼굴을 태웠다. 공연장 꾸미고, 음악회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찍었다. 살갗 따가운 것 모르고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날아다녔다. 아니, 몸은 무거웠으리라. 그는 50여 년 된 한센병 환자다.
한센인 이남철씨는 35년 동안 섬의 일상을 기록했다. “얼굴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손발을 쓰기가 갈수록 불편해진다”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카메라와 함께 자리한다.
기억
44년 전 일이 어떻게 그렇게 선명할까. 1966년 5월 16일이었다. 밤 9시 제비 선창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한센병 환자와 함께 배에 탈 수 없다고 해 따로 만들어놓은 곳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체구가 지금처럼 유난히 작았던 것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씨는 이렇게 소록도에 왔다.
아버지는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가라”고 했다. 그 말이 호기심을 불러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보낸 화병으로 82년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를 여기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향 전남 함평의 작은 마을에서 소문은 빨리 퍼졌다. ‘이씨 집안 여섯 형제의 장남, 남철이 눈썹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말이 동네를 훑었다. 가까운 곳에 나병 환자 정착촌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병의 증상을 빨리 알아챘다. 집에서 나갈 수 없었다. 동네 보건소에서 나병이라 진단하고 약을 줬다. 어찌나 독한지 먹고 나면 얼굴이 온통 새까맸다. 손발이 문드러지는 건 여전했다.
그래서 밤이 천국이었다. 낮에는 방에 틀어박혔고, 해가 지면 어디로든 쏘다녔다. 까불고 장난기 많던 아이가 하루 종일 방에 누워 해 지기만 기다린 게 몇 해였다. 그는 “독한 약을 먹으면 보신을 함께했어야 하는데, 기름기 있는 걸 전혀 못 먹어서 그런 거지”라고 기억했다. 각박한 살림이 그를 소록도에 보냈다.
처음 1년은 집에서와 똑같이 보냈다. 낮에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방에 있었다. 밤이나 돼야 돌아다녔다. “선생님도 환자, 학생도 환자인 공민학교만 겨우 다녔지. 다들 똑같은 모습의 환자들인데도 누구나 여기 오면 처음에는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해.” 국립소록도병원 직원인 김광문씨는 “23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는데, 다른 게 다 바뀌어도 밤이면 소쩍새 우는 건 안 변한다. 적막한 밤에 그 소리는 사람을 미치도록 외롭게 한다”고 전했다. 그 밤을 이씨가 누볐다.
그를 낮으로 끌어낸 것이 카메라다. 소록도 공원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이 35년 전 뭍으로 나갔다. 그 자리가 이씨에게 갔다. “그냥 지나갈 일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게… 이걸 꼭 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 소록도는 그런 게 통 남아 있지 않으니까. 물론 나는 무작정 그냥 찍는 거지만.” 처음에는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록도의 일상과 풍경, 행사와 역사를 일일이 기록했다. 소록도국립병원의 매년 시무식·종무식을 카메라에 담았다. 자원봉사자들의 위문 공연 장면도 남겨놨다. 가수 인순이·김수철·나훈아가 왔을 때도 사진을 찍었다.
대형 가수들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소록도에는 여수에서부터 사람이 온다. 고향 동네 사람들도 소록도에 점차 많이 왔다. ‘남철이가 토굴에 살고 있지는 않더라’ ‘남철이가 아주 번듯하게 잘살더라’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이제는 형제들과도 자주 왕래한다. 그는 이 같은 소록도의 변화, 특히 잔칫날을 놓치지 않고 싶다고 했다. “남들은 한번에 한두 장씩 사진을 찍지만 나는 연속으로 수백 장씩 매 커트를 남겼다”고 하는 이유다. 그런데 2년 전 전시회를 열어볼까 하고 찾아보니 사진이 모두 습기에 젖어 못 쓰게 됐다. 2003년 디지털 카메라로 바꾸기 전까지의 30여 년 기록이 모두 헛것이 됐다. 그는 그 이후 아예 동영상으로 모든 순간을 남겨놓는다.
음악
“오늘 영국 사람들이 한 음악회 같은 건 난 잘 모르지. 유명한 분들이라고 하대.” 그는 5일 새벽에도 카메라를 둘러멨다. “그래도 그 있잖아, 예술적으로 통한다는 게 있어. 사진이고 음악이고, 내가 좀 예술적인 걸 좋아해서.”
기억이 74년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한참 퇴원을 많이 했을 때인데, 우리 교회 반주자도 빠졌지.” 막무가내로 피아노 앞에 앉은 게 그였다. 지금은 악보 없이도 웬만한 찬송가를 반주한다. 컴퓨터도 익혔다. 인터넷에 소록도 카페(cafe.daum.net/sorokchurch)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올리고, 소식을 전한다. 병 걸린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치는 모양으로 굳어 있다. 키보드를 치는 모양이기도 하다. 병이 남긴 우연치고는 묘하다.
소록도 사람들이 나갔다 다시 들어오고, 또 나가는 사이 그는 묵묵히 섬에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소록도 지킴이’다. 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처음 왔을 때는 화도 나고, 막막했지. 또 환자는 수천 명에 의사는 두 명, 간호사 다섯 명일 때도 있었고. 괜찮다가도 명절이 되면 너무 외로워져 하루 종일 멍하니 보내기도 했지. 그런데 버틸 수 있는 건 신앙심과 이런 사진이나 음악 같은 거고. 아니면 도저히 극복 못했을 것 같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잡념을 없앤다고 했다.
소록도에는 이씨처럼 음악과 예술을 벗삼는 사람이 많다. 영국 ‘레이디 R 재단’의 로더미어 자작 부인은 “6년 전부터 방문할 때마다 어디에선가 하모니카와 노랫소리가 들렸다”며 이날 음악회를 구상했다. 섬 사람 600여 명 중 80%가 기독교 신자인 만큼 찬송가가 인기다.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던 김범석씨는 이 섬에서 날마다 울리는 하모니카 소리에서 감명을 받아 2008년 『천국의 하모니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음악이 소록도에 맴도는 이유는 뭘까. 이씨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했다. “저쪽 방에 사는 사람은 다리가 없어. 꼭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되고, 어떤 사람은 팔·다리 다 없이 죽기도 했지. 또 눈이 전혀 안 보이는 사람도 많고. 이 병이 꼭 눈을 공격해서 말야. 어떻게든 앉은뱅이나 다름 없는 건데, 노래하고 시 짓고 그런 게 위안이 되지.”
손님
편견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육지의 일부 음식점에서는 아직도 섬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다. 이씨는 “다른 이유가 있겠어, 손님 떨어지니까 그렇지. 밥 먹고 있으면 주인이 와서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는 뒷문으로 좀 다녀 달라’고 말할 때도 있어”라고 했다. 섬 사람들이 여간해서 바깥 출입을 안 하는 이유다. 그래서 이들은 섬 찾는 손님을 유독 반긴다. 5일 영국에서까지 손님이 오자 섬에는 기대와 흥분이 번졌다. 국립소록도병원의 박형철 원장은 “섬의 100여 년 애환의 역사 중 오늘은 가장 행복한 날이다. 나는 물론 주민들이 음악회 소식을 듣고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400개의 객석이 있었다. 이 중 절반을 소록도 주민들이 썼다. 미리 신청을 받아서 추렸다.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정신이 온전하며 30분 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선발된 200명 중에도 60% 정도만 혼자서 공연장에 올 수 있었을 정도다. 일제 시대 섬에 들어와 혹독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1세대 50여 명은 대부분이 노인성 치매로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200명의 타지 사람과 7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희망
10개월 동안 공연을 준비한 ‘레이디 R 재단’의 박지은 팀장은 “한번의 시끌벅적한 음악회로 소록도에 상처만 내지는 않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섬의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공연장이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이 아래 동네는 묘하게도 조용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400여 명의 사람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재단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서 공연의 의미를 찾는다. “공연 하나로 모든 아픔을 씻고 차별을 지울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연을 위해 대한적십자사, 경남에너지, 고흥군, 광신대학교, 서울시 보라매병원, 레스토랑 빌라 에트바스, 삼성전자, 씨투 미디어, 이노엠모델 등이 자원봉사자와 각종 물품으로 대가 없는 지원을 보냈다.
이날 공연은 소록도에 두 가지 선물을 줬다. 음악과 손님이다. 이남철씨는 “같은 처지를 이해하며 곁에 있는 아내, 다시 만나게 된 형제들이 삶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옛날 우리 고향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른 마을에서는 나병 환자가 나오면 우물물도 못 긷게 했다는데, 우리는 그러진 않았거든. 사람들이 다 가혹한 건 아니지.” 사람에 대한 용서와 화해, 사랑이 더디게 시작되고 있다.
5일 오후 남부 지방에 봄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일부 틀렸다. 섬 역사상 최대의 손님 맞이, ‘소록도의 필하모니아’ 공연은 화창한 날씨 속에 순조로웠다. 걱정하던 스태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후 2시 시작된 음악회와 작은 파티가 세 시간 만에 끝나고 청소까지 모두 마치자, 그제야 후두둑 빗방울이
|
오늘 : 3832 명
